아듀, 산비둘기여!

몇 년 전인가 갤러리에 작품을 운반하고 돌아왔을 때
우린 커다란 창틀 밑에 목이 부러진 채 죽어 있는 산비둘기를 한 마리를 보았었다.
늘 두 마리가 한 쌍으로 날아 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때로 집 앞 큰 나무에 앉아서 함께 나무 열매를 먹곤 하던 한 쌍이었는데....
우린 죽은 새를 상자에 넣어 뜰 한 구석에 묻어 주었다.

그 후로 남은 한 마리는 잘 울지도, 먹지도 않은 채
둘이 함께 앉아 있던 나뭇가지에 앉아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내가 운동을 할 때면 늘 건너편 나뭇가지에 앉아 우리 집 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 어딘가 있을텐데 하며 둘러보면
어김없이 제 자리에 앉아 있는 그 새가 반갑기도 했지만
우린 그가 빨리 상처를 잊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었다.



그런데 바로 어제
나는 작업을 하고 남편은 잔디를 깎고 있었는데
갑자기 '쿵'하는 소리를 들었다.
가슴이 철렁 했다.

넓은 창공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새들은
깊은 산 속에 살고 있는 우리 집 유리창을 일종의 하늘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기사 그들이 유리와 허공에 대한 차이를 알 수 있겠는가?
그동안 유리창이 깨지는 경우도 있었고
수많은 새들이 유리창에 부딪쳐 다치거나 죽은 경우를 보았던 우리는
그 소리의 크기로 미루어 불길한 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다.
바로 하나 남았던 그 새였다.
유리창에 정통으로 부딪쳐 목이 부러진 채 데크 바닥에 떨어져 죽어 있는 그 새는
아직도 체온이 식지 않아 가슴이 따뜻한 채였다.
우린 서로 마주 바라보며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 새가 싸늘하게 식었을 때
잘 싸서 뜰 한 구석 먼저 떠난 새가 묻혀있는 곳 근처에 묻어 주었다.



오늘 아침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라본 큰 나뭇가지는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숲이 텅 비어버린 듯한
가슴 한 쪽이 뻥 뚫린 듯한
이 허한 가슴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이 혹시 저 세상에서
반가운 해후를 하지는 않았을까?

그들의 명복을 빈다.

by GALLERY SISILY | 2009/11/09 12:44 | NZ LIFE 뉴질살이 | 트랙백 | 덧글(0)

가지를 치면서

이 나라에 온지, 아니 이 집에 온지 벌써 8년이 지났다.
그 동안 수많은 눈물, 한숨 그리고 탄식이 있었지만 기쁨과 환희의 순간도 있었다.

꼬불꼬불한 숲길로 이루어진 드라이브웨이를 오르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자동차를 돌려 나가도록 되어있는 (우리는 이것을 섬이라고 부른다) 좁고 긴 화단이 있는데
여기에 나무가 몇 그루 심어져 있었다.

처음 우리가 왔을 때만 해도 사람 허리 정도로 나지막한 나무였던 것이
그동안 세월이 지나면서 어느 날 보니 목을 완전히 꺾고 올려다 보아야 할 정도로 자라 있었다.
게다가 그 무성한 가지 때문에 차량 통행시 시야를 가릴 뿐 아니라
그 단단한 잎이 차를 긁어서 차량 표면에 상처를 낼 정도로 되었다.

법령도 까다롭지만 늘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 보니
그동안 나무가 자라는 것에 신경을 쓰지 못했었는데
이 달부터 자기 집안에 있는 나무의 가지치기가 허용된다는 뉴스를 본지라
몇몇 나무의 가지치기를 실행하기로 하였다.

남편이 사다리에 올라가 낫과 톱으로 가지를 베어내는 동안 나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사다리를 붙잡고 있었는데 ...
갑자기 베어진 나뭇가지 하나가 내 몸 위로 떨어져 나뭇잎 가장자리에 솟아있던 가시가 내 등에 박혀 버렸다.
그렇다고 사다리를 놓아 버릴 수도 없고.
비명을 지르면서 일을 마치고 난 뒤에 거울에 비쳐보니 가시가 박혔던 상처에 피가 솟아있었다.

그냥 사라져 가기가 아쉬웠던 것일까?

잘라져 쌓인 나뭇가지의 양이
우리가 쌓아온 세월의 무게 만큼 이나 커보였다.



by GALLERY SISILY | 2009/11/09 11:36 | 미분류 | 트랙백 | 덧글(0)

우리들의 이야기 (보이지 않는 전쟁)

2009년 10월 15일밤 7시 변덕스러운 봄날 저녁, 유서 깊은 티티랑이 홀에서
2009년 뉴질랜드 도자기 국전 시상식이 열렸다.
수많은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우리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장내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졌다.
콧대 높은 백인들의 틈에서 우리 두사람은 유일한 아시안이었고, 당연히 유일한 수상자였다.
우리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우리 또한 할 말을 잊었다.

              (우리 작품사진과 작품설명 : 두 페이지에 걸친 것을 편집한 것)

하지만 그것은 그들과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작년과 꼭 같은 상을 2년 연속으로 수상하다니...
만약 그간의 behind story 가 없었다면 그건 대단히 영광스러운 상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8월부터 시작된 심사과정은 길고 지루한 여정이었다.
이번 심사관은 미국의 교수 Scott 이란 사람으로 1년간 이 나라 폴리텍에서 교환교수로 와있는 중이었다.
예상했던대로 1차 이미지 심사를 통과했고 실물심사를 위하여 지정된 기일에
작품을 심사장소로 운반한 후 2주 정도가 지난 어느날이었다.
아침에 국전이 열리는 갤러리 매니져로부터 우리 작업장을 방문하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2차 심사를 앞두고 이런 경우는 없는지라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무슨 일이 있는거냐고 물었더니
심사관 Scott 가 우리 작품과 작업장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머무는 두 시간 남짓 동안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작품 설명은 물론 제작기법과
우리나라 도자기 역사 등을 설명했고 급하게 준비한 김밥과 김치, 된장국으로 함께 점심식사까지 하였다.
Scott은 우리 작품에 대한 감탄을 아끼지 않았고 우리 작업 도구 하나하나까지 세심히 살펴보며
질문을 했고 우린 최대한의 성의로 그를 대했다.
사실 이국인인 우리로서는 국전 심사관의 방문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우리 작품에 대한 평가)

모든 과정이 끝난 후 Scott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는데
우리가 낸 세 작품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작품 하나를 현재 우리 집에 있는 것으로 바꾸면
더할 수 없이 완벽한 셋트의 작품이 될 것 같다고 극찬을 하는 것이었다.
2차 심사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담당 심사관이 직접 와서 셋 중 하나를 교체하면 완벽할 것 같다는데
그 누가 이를 반대할 것인가?
우린 그 다음날 바로 그가 말한대로 한 작품을 교체했었다.

1주일후 2차 실물심사 결과 200여개의 작품 중 23명을 뽑았는데
우리 작품도 그 중 하나로 선정되어 전시회를 가진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10월 15일 밤 마지막으로 최종 심사결과 1,2,3 등이 발표된 것이었다.
우리는 Scott 의 방문으로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너무도 우호적으로 우리를 대했고 대놓고 너희가 1등이라는 말은 안했지만
어느 정도는 암시를 했었기 때문에 올해도 작년과 같은 특별상을 받게 되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그러니 특별상에서 우리 이름을 호명할 때 놀랄 수 밖에...

곧 이어 열린 전시회 오프닝에서 이상한 광경이 벌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작품 앞에만 몰려서 감탄을 하고 사진을 찍고
심지어는 도록에 우리 사인을 해달라고 졸라대는 것이었다.
두 사간 이상 목이 쉬도록 설명을 하고 함께 사진을 찍고...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다음 날 새벽 두 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린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끝없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는데 결론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았다는 것이었지만 
결과는 이미 발표된 것이니 받아들이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어쨌든 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주최측에서 우리 작품 중 하나를 $9.900 에 구입해서
영구소장을 하는 점에 위안을 받을 수 밖에.

곰곰히 생각해 보니 Scott이 우리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새로운 기법으로 만들었던 작품을 교체하라고
한 점과 작품 제작기법을 설명한 우리 Statement에서 제작과정을 설명한 부분을 쏙 빼고
도록을 만든 점 등을 고려할 때 다음 달에 미국에 돌아가는 그가 미국에 가서 우리 기법을 이용해서
발표를 함으로써 도예계에서 우리의 새로운 기법을 자신이 선점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점으로 귀결이 되었다.
그리고 나니 그가 그토록 작품 제작과정에 관심을 보이고 제작도구를 실제로 사용해 보며
세세한 질문을 했던 점이 이해가 되는 것이었다.


                     ( 이 나라 언론 보도내용과 Mr. Len Castle 의 친필 편지)

가장 평등하다는 이 나라에서까지도 장벽을 느껴야 하는 점에 답답한 시간이 이어지던 중
현지 언론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있었다.
1등을 제쳐두고 굳이 우리에게 인터뷰 요청을 한 것이 이해되지 않았고 또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이것도
일종의 애국이라는 생각으로 우린 우리나라 도자기 역사와 우리 작품 세계에 관해서 열심히 설명을 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우린 카드 한 장을 받았다.
Mr. LEN CASTLE은 국비로 유학을 시키면서까지 이 나라에서 키워낸
이 나라 도예계를 대표하는 거목이다.
90세를 바라보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열정을 가진 예술가로
이 나라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어른인 것이다.
해마다 국전이 열리면 외국에서 온 심사관이 그를 찾아가서 심사결과에 대한
조언을 얻을 정도의 위치에 있는 분인데 (이번에 Scott 은 그의 조언없이 독단적으로 했다고 한다)
그런 분이 친필로 쓴 편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내가 심사를 했더라면 너희 작품에 $12.000 (1등) 을 주었을 것' '우리 작품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 모든 귀절에 그야말로 우리가 감동을 받았다.
이 나라 최고의 도예가가 우리 작품을 인정해 주었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결국 우리가 차별을 받았다는 점은 우리만의 생각이 아니었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었다.

어쨌든 삶은 계속될 것이고
살아있는 한 우린 계속 이 험난한 길을 갈 것이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든, 소리 없는 전쟁이든 간에 말이다.

by GALLERY SISILY | 2009/11/06 18:05 | NZ LIFE 뉴질살이 | 트랙백 | 덧글(0)

슬픔 그 이상의 아픔으로

           <해와 달이 共存하는 시간 속에서>

타의에 의해서 엠파스에서 이글루스로 방을 옮긴 이후 몇 달간 글을 쓴 적이 없지만 오늘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외국에 산다는 이유로 본인 확인이 불가능하여 노대통령 추모글을 남기거나 추모서명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으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슬픔이 독이 될 것 같다.

이십 칠 년간의 공직생활 동안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몇 번은 정치와 관련된 곳으로부터의 권유도 있었지만 난 거부했었다.
그 아수라장 같은 곳에서 내 신념을 지켜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결국 그건 내 이기주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짧지 않은 공직생활 동안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채 
자신이 믿는 가치에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 일인지 알기에
또 우리 사회에서 학벌도 배경도 돈도 없는 존재로 버텨내기가 얼마나 아픈 것인지 알기에
난 그 분의 고통을 짐작할 수가 있다.

처음 국정감사에서 그를 보았을 때 그는 투박한 모습에 달변의 국회의원이었다.
그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없는 사람들의 변호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도 조금 신선한 느낌 외에는 없었다.

그런 그가 수 만리 떨어진 이 낯선 곳에서 내 눈물을 흐르게 하고 있다.
견딜 수 없는 이 상실감, 분노, 자괴감, 죄책감....
왜 우리 사회는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가?

그 분이 그토록 외로운 길을 걸었고 또 마지막까지 외로운 그 길을 스스로 택하여 떠났는데
뒤에 남은 우리는 그저 부끄러운 눈물을 흘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니...

지금 그저 깜깜한 어둠 속에서 막막한 슬픔 그 이상의 아픔으로 앉아 있다.


by GALLERY SISILY | 2009/05/24 17:38 | NZ LIFE 뉴질살이 | 트랙백 | 덧글(0)

미지의 바다 KAIAUA


< 남편, 그리고 KAIAUA 바다 >


< 마을 앞 바닷가에 만들어 놓은 조각배와 갈매기 >


< 중노동에 깜둥이가 되어버린 나 - 내가 봐도 싫다! >

올해 들어 집 보수 및 페인트 공사를 시작한지 13일째.
어제까지 계속 둘이서 이층 지붕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RUST KILLER 를 바르고 샌딩을 하고 페인트칠을 했다.
함석으로 된 지붕은 거의 30도 각도로 경사가 져서
그 곳에서 내려다 보는 숲의 경치는 그야말로 환상이지만 잠시 아래를 내려다 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까마득했다.
게다가 그동안 날씨는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폭양이 계속되는 바람에
땀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숨을 헐떡이면서 일을 해야 했다.
어쩌다 지붕 바닥에 손을 짚으면 화상을 입을 만큼 뜨거워 깜짝 놀라기 일쑤였고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가져다 둔 물은 햇빛에 뜨거워져서 마실 수가 없었다.
그동안 사다 나른 재료비와 페인트값만 해도 우리 돈으로 250 만원이 훌쩍 넘어버렸는데...
아직 얼마나 더 계속해야 할는지 모르겠다.
휴가철이라 사람을 쓸 수도 없고 쓸 수 있다고 해도 인건비가 워낙 높아서
사람을 고용해서 일을 하려면 그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으니 어차피 죽으나 사나 우리 둘이서 해결할 수 밖에 없는거다.
처음엔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가는 것이 두려워 다리가 떨리고 현기증이 나곤 했다.
하지만 모든 일은 익숙해지는 단계가 있는지 이제 조금은 익숙해진 것 같다.
이제 몇 번 더 올라가서 군데군데 덧칠을 해주고, 튀어나온 못을 박아주고
빗물을 받는 홈통에 나뭇잎이 쌓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GUTTER FILTER를 장치해 주면 일단 지붕작업은 끝이 난다.
그리고 나면 다시 1, 2층 데크의 난간과 윤곽을 칠하고, 거실 천정까지 칠하면 큰 작업은 일단 끝!!!
그런데 오늘 아침 눈을 뜨니 반가운 빗소리가 들렸다.
노동자들은 '비 오는 날이 공 치는 날' 이라 했던가?
그동안 격한 노동에 질렸는지 남편이 어디 좀 다녀올 것을 제안했다.
쏟아지는 빗속에 가는 게 좀 걱정스러웠지만 막상 길을 나서자 곧 날씨가 맑아졌다.
템즈라는 도시 갤러리에 가서 작품 판매 문제를 협의하고 나서 햄버거로 점심을 해결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동안 말로만 듣던 지명이 보이길래 그 길로 접어들었다.
지도를 보니 거리상으로는 한참이나 돌아가는 먼 길이지만 그동안 늘 서둘러 다니느라고 한 번 도 못가본 길이라
모험심이 발동했던 때문이었다.
아득한 지평선까지 끝없이 계속되는 평야지대를 지나자 갑자기 눈 앞에 펼쳐진 바다.
폭우로 인해서 물빛깔은 다소 탁했지만 수많은 조개껍데기가 쌓여서 만들어진 해변은 백사장보다 더 아름답고 눈부셨다.
그 곳에서 낚시를 하는 꼬마와 잠깐 얘기를 나누며 머물다 다시 길을 떠났다.
차를 달리면서 보니 군데군데 팔려고 내놓은 작은 집들이 있길래 적어와서 인터넷으로 뒤져보니...
하품이 날 가격이었다.
그렇겠지. 바닷가에 있는 집들이니...
그래도 오막살이 같은 집들의 가격으로는 너무한다 싶었다.
로또라도 당첨되지 않는 한 아마 우리는 바닷가에서 살아보지는 못할 모양이다.
그런데 그 것도 가망이 없는 일인게
내 생애 단 한 번도 로또 티켓을 사 본 일이 없으니...
분수에 맞지 않는 행운은 바라지 않는 내 성격 때문이다.

by GALLERY SISILY | 2009/01/18 19:39 | NZ LIFE 뉴질살이 | 트랙백 | 덧글(2)

물위에 피는 칸나


겨우 작업장과 개러지 지붕의 2차 도색을 끝내고 금붕어 밥을 주기 위하여 연못에 갔다.
언제부터인가 연못 가운데 길다란 줄기 하나가 올라오길래 수초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그것이 꽃을 피웠고 난 그 꽃이 칸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어렸을 때 살던 집은 - 그것을 집이라고 불러도 좋은 지 잘 모르겠지만 -
산을 삽으로 깎아 대충 평평하게 만든 후에 천막을 치고 바닥에 가마니를 깐 그런 곳이었다.
그 초라한 집에 특별한 곳이 한 군데 있었으니 바로 장독대 옆 꽃밭이었다.
꽃을 유난히 좋아하시던 어머니는
그 알량한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꽃을 심고 가꾸는데 열정을 가지고 계셨다.
손수 가꾼 화단에는 맨 앞 쪽에서부터 키 순서대로 채송화, 맨드라미, 분꽃, 은방울꽃, 나비꽃, 다알리아....
그리고 맨 뒤에는 키가 가장 큰 해바라기가 줄지어 피었는데
그 키다리 해바라기 바로 앞에 피었던 꽃들이 역시 키다리인 칸나 (어머니는 '홍초'라고 불렀다) 였던 것이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진 그 아름다운 꽃밭을 그리워 하며 '칸나의 뜰' 이던가 하는 소설책도 사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추억 속의 칸나가
이 머나먼 지구의 남쪽 섬나라 뉴질랜드, 내가 사는 산 속 집 연못 속에 꽃을 피워 올린 것이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슬픔 그리고 그리움.
가신지 7 년이 넘었으니 어머니는 이미 흙이 되셨을 것이다.
그 어머니의 넋이
흙이 아닌 물 속에 꽃을 피우면서까지 나를 찾아오신 것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에
하염없이 꽃을 들여다 보고 서 있다.

by GALLERY SISILY | 2009/01/10 18:13 | NZ LIFE 뉴질살이 | 트랙백 | 덧글(2)

밤의 진화(進化)


<밤의 시작 과 낮의 뿌리와의 共存>





요즘 여름철 휴가기간이라 세일을 하길래 페인트를 사왔다.
처음 이사올 때 40여 살 먹은 집 답지 않게 깨끗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저기 늙은이 다운 노추를 드러내길래
언젠가는 해야지 하면서도 바빠서 손을 못대고 있었는데
이층 데크를 받치는 기둥에 박힌 철제 죔쇠들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핏빛 녹물을 눈물처럼 흘리기 시작했다.
그 눈물이 벽면에 몇 줄기로 번져 내리는 것을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워서 드디어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처음엔 그저 녹슨 부분을 그라인더로 갈아내고 언더코트와 페인트 칠을 할 정도만 생각했는데
막상 손을 대고 보니 데크 난간과 기둥, 작업장 과 개러지 지붕, 개러지 벽, 이층 데크의 난간
그리고 거실 천정에 이르기까지 손을 댈 곳이 너무 많은 것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여러가지 빛깔의 페인트와 로울러, 붓까지 사왔다.
둘이 각각 분담해서 나흘째 작업을 하는데 아직 반도 못했다.
게다가 내일은 페인트와 프라이머를 더 사와야 할 것 같다.
결국 세수하다 머리 감고 이제 목욕까지 하게 된 꼴이다.
하지만 공사가 끝난 후 새 집의 모습을 그리면서 각자 다른 곳에서 하루 종일 묵묵히 일을 하고 있다.
오늘은 수시로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한 여름의 땡볕이 그대로 내려 쪼이는 작업장과 개러지 지붕에서 작업을 했는데
밝은 모래 빛깔의 페인트 위로 반사되는 태양이 어찌나 강렬한지
선글라스를 썼는데도 눈이 부셔서 괴로울 정도였다.
게다가 지붕 위에서 느끼는 그 태양의 열기란... 아마 계란 후라이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진통제를 두 알이나 먹으면서 1차 도색을 마치고 내일 2차 도색에 들어갈 것이다.
작업을 마치고 내려오니 저녁 여덟시 반 - 여름날이라 그래도 아직 해가 남아있다.
정신 없이 저녁을 준비해서 한참 먹다가 문득 밖을 보니 하늘은 막 밤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미처 어둠이 내리지 못한 하늘 아랫쪽에 한낮의 잔영이 남아 있는데
하늘 꼭대기에는 성질 급한 상현달이 이미 둥실 솟아 있었고
눈을 돌려 서편 하늘을 보니 그 곳에는 이미 밤이 점령해서 노을에 붉게 젖은 구름만 몇 떨기 떠 있었다.
이보다 더 아름답고 오묘한 그림이 있을까?

by GALLERY SISILY | 2009/01/08 18:50 | NZ LIFE 뉴질살이 | 트랙백 | 덧글(1)

해변의 오후


<해변에 핀 포후투카와 꽃>


<물 빠진 바닷가의 한적한 오후 : CAMBELLS BEACH 에서>
올해는 경제부진의 여파로 어차피 작품도 잘 안팔리니 8년 만에 좀 쉬기로 했는데
노는 것도 해 본 사람이나 하는 일인지
어떻게 놀아야 잘 노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늦게 배운 도둑질(?)이라고 또 낚시여행을 갔는데 이번에는 그것도 꽝이었다.
그래서 바닷가 바위를 건너 다니며 썰물에 드러난 바위에 고인 바닷물 속을 들여다 보았는데
햇살 속에 투명하게 맑은 바닷물 속에는 그 나름대로의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이었다.
푸른 해초 속에 작은 물고기와 성게, 홍합과 굴, 따개비, 소라와 고동, 그리고 작은 조약돌까지
어쩌면 그리도 다양한지 마치 미니어쳐로 만들어 놓은 동화속 세계를 보는 것 같았다.
소인국에 온 걸리버처럼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싫증 나지 않는 바닷물 속에 손과 발을 적셔가며 오후를 보내고
김밥과 커피로 간식을 마치고 가까운 곳의 CAMBELLS BEACH 로 자리를 옮겼다.
한적한 휴일 오후
바닷물이 빠진 모래사장 위에 작은 배들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얹혀 있는 모습은
또 다른 평화의 모습이었다.
그래,
2009 년은 이렇게 한적한 평화 속에서 시작되었다.

by GALLERY SISILY | 2009/01/04 14:13 | NZ LIFE 뉴질살이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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